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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파이(1952~1962년) 만화를 말하다~

양수골 2009. 2. 10. 09:43

 
 
한영주(「다시보는 우리만화」 저자)
1970년대 생인 필자에게 <라이파이>는 그리움이 묻어나는 추억의 만화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갑자기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기념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규모에 걸맞은 긴 그림자를 역사 위에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만화계에서 <라이파이>는 하나의 전설이다. SF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환상의 명작! 작가의 갑작스런 도미(渡美)로 인하여 신비화되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확실히 <라이파이>는 “한국 SF만화 최초의 성공작”으로서, 그리고 “최고의 판매 및 구독 기록을 수립한 공전의 히트작”으로서 우리 만화계에 신기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깡통 로봇이나 비행접시가 소품처럼 등장하는 이전의 SF만화들에 비한다면, <라이파이>는 이미 몇 단계나 진일보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SF만화가 가장 빛났던 시기다. 라이파이 이후 SF만화는 쇠弔狗罐? 걷는다. 물론 그 이후에 좋은 SF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SF는 사실상 소수적 장르가 되었다. SF가 1960년대처럼 시대를 대변하는 장르가 된 적은 다시 없었다. 또한 만화계의 SF붐이 다른 장르로 파급된 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예컨대, 문학의 경우 SF소설을 본격적으로 수입 번역한 것은 1960년대 초반, 라이파이 시리즈가 끝나갈 무렵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에 대부분의 SF소설들이 ‘아동용’으로 개작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인데, 아마 라이파이로 촉발된 SF붐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라이파이가 “정말 중요한 작품이구나!”하고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 듯이, ‘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환상적인 발차기로 적들을 무찌르던 정의의 용사’를 묘사하면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때이다. 그들의 추억담 속에서 라이파이는 만화를 넘어 어떤 신화처럼 되살아나는 것 같다. 도대체 그 무엇이 라이파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1 전 지구를 누비는 스펙타클의 세계
<라이파이>를 신화로 만든 첫 번째 요인은 거대한 스케일의 공간감이다. 남극과 북극, 히말라야, 남미의 안데스산맥, 그리고 남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어느 곳도 <라이파이>의 무대가 아닌 곳이 없다. 사실 지구도 좁다. 결국 지구에서 멀리 떨러진 어떤 혹성과 달, 그리고 녹의여왕이 온 초록별(그린스타)까지, <라이파이>의 배경은 우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발전된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엄청난 속도감(!) 덕분에 이들 공간이 결코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광속으로 움직이는 제비기를 타면 단 몇 시간 만에 지구를 횡단할 수 있다. 덕분에 라이파이는 오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침입한 악당을 무찌르고, 오후에는 히말라야에 있는 적들의 근거지를 소탕하는 종횡무진한 활약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넓은 공간적 배경은 라이파이의 능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만, 무한한 라이파이의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오히려 좁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파이>의 공간들, 악당들의 기지와 요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 시리즈를 통해서 살펴보면, 주로 험준한 산맥과 사막, 거대한 호수, 극지방 등 자연적 고립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인간의 손이 미칠 수 없었던 자연을 ‘정복’했다는 것, 즉 그들이 그만큼 놀라운 과학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의미한다. 공간은 넓을 뿐 아니라, 미답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미지의 공간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이러한 공간의 개척이 15세기 이후 계속되어온 서구의 탐험과 모험문화, 즉 그것은 발견(개척)해야 할 미지의 공간으로서의 ‘신대륙’과 ‘동양’을 바라보던 ‘서구’적 시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곳은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비(非)서구’적인 곳으로 다시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한편에서는 신비롭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곳! 이러한 관점은 1960년대 유행했던 모험, 탐험만화에 일반적으로 나타났으며, 서구의 모험, 탐험소설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2. 영웅(Super-Hero)과 악당(Anti-Hero)
<라이파이>를 신화로 만든 두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성적인 캐릭터의 창출에 있다. 정의로운 영웅과 비열한 악당들! 그리고 이전 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 이 만화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1) 라이파이: 초인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라이파이는 초인이다. 빠르고, 힘이 세며, 강한 정신력을 지녔다. 거의 외모, 그러니까 흰 두건과 검은 마스크, 그리고 가슴에 ‘ㄹ’자(라이파이의 이니셜!)가 새겨진 타이즈 차림의 복장을 보면 얼핏 미국만화의 영웅이 떠오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늘을 날고, 건물을 투시하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슈퍼맨보다는 뛰어난 운동신경과 과학기술로 무장한 배트맨 쪽을 닮아있다. 다른 설정들도 비슷한데, 배트맨의 부모가 지하세계의 범죄자들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부호였던 라이파이의 부모도 그가 아기였을 때 도적단의 침입으로 죽는다. 또 배트맨에게 동료 로빈이 있는 것처럼, 라이파이에게는 제비양이 있다. 사실 배트맨은 라이파이의 절친한 친구이며, 가끔 만화 속에 깜짝 출현을 하기도 한다.(그림1)

그러나 라이파이는 배트맨을 비롯한 미국의 영웅들과 전혀 다르다. 우선 그는 단일한 인격을 지녔다. 즉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의 또 다른 인격이고,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라는 보통 사람의 가면을 쓰는 것에 비해, 라이파이는 ‘라이파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을 갖는다. 비록 얼굴은 감추고 있지만, 숨겨진 인격이나 이면은 없다. 그러므로 배트맨처럼 어둠 속을 고독하게 헤맬 필요도, 수퍼맨처럼 무력한 겁쟁이의 모습을 연기할 필요도 없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다.

둘째, 라이파이는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그는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와 국적, 민족에 상관없이 악의 무리와 싸운다. 그러므로 ‘미국’(혹은 미국이라고 상정된 가상의 공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미국의 영웅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라이파이』에는 악당들에 맞서 연합군이나 동맹군이 자주 결성되는데, 라이파이는 때때로 이들과 공조를 이뤄 악을 물리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라이파이』는 자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오만함 대신 이웃나라와 대등하게 공존하는 세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이파이는 초인이면서, 또한 ‘인간’이다.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가스나 마약 등에 심심찮게 당하기도 하고, 강철로봇과 싸울 때에는 “아이구, 발이야, 역시 무쇠덩어리라서 내 발만 아프구나.”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제비기를 비롯하여 유도창, 송신기 등의 첨단 무기들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라이파이의 곁에는 항상 동료들이 있다. 제비기를 운전하는 제비양을 비롯해서, 정보분석과 정세판단을 도맡아 하는 김탐정, 최신 무기들을 개발하는 윤박사, 그리고 요새를 지키는 채삼병씨에 이르기까지, 라이파이의 힘은 이들 모두가 제 몫을 할 때, 가장 극대화된다. 그러므로 라이파이는 고독한 영웅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팀인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점은 라이파이가 악당 등을 물리적인 힘으로만 제압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악상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교화시키려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 복수와 응징이란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 그는 폭력이란 정의의 이름으로 사용해도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라이파이가 영웅일 수 있는 최고의 이유다.

2) 악당들, 야심찬 혹은 비열한!
만화 <라이파이>가 히트작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라이파이의 상대로 손색이 없을 만큼의 강력한 악의 존재가 한 몫을 했다. 전 시리즈를 통해 대단히 많은 악당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광적인 과학자들.
Z단의 리차드 메이슨(1부)이나 ZS단의 피너3세(2부)가 이에 속한다. 새로운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세계정복을 꿈꾼다.

둘째, 고대국가의 후예들.
잉카제국의 후예인 녹의여왕(3부)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예인 이루쿳치(3부), 그리고 십자성의 공주인 벤핑히(4부)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구름이나 연기를 타고 다니고, 마음대로 번개를 일으키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요술이나 마법이 아니라 대단히 높은 과학기술의 결과라는 점이 흥미롭다. 한마디로 그들은 대단히 높은 과학기술을 영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과거의 복수를 꾀한다. 근대의 비극적 역사와 고대제국의 신비를 연결시킨 점이 흥미로우나, 지난 역사 속에서 피해자였던 민족들이 또 다시 ‘악’의 편으로 설정되는 점이 안타깝다.

셋째, 공산주의자.
전 세계 인민해방군 혹은 붉은 제국(4부)이라 불리우는 무리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서의 분열과 반목으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세계사상전쟁에서 패배한 잔당들로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세계를 해방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으며, 신무기 개발을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하는 등 ‘반자본주의’적 행각을 벌인다.

악당이란 그 스스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웅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악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라이파이의 활약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악이 비열하면 비열할수록 라이파이의 정의로움은 더욱 빛난다. <라이파이>에 등장한 악당들의 공통점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한편 이들은 높은 과학기술에 비해서 대단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적이나 부하를 채찍으로 고문한다든가, 콜로세움에서 거인이나 사자와 싸움을 붙인다든가 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죽기 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감동적인 라스트 씬을 연출하기도 한다.

3) 여성들, 조력자에서 팜므 파탈까지!
<라이파이>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요인들 중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성캐릭터들이다. <라이파이>에 나타난 여성상은 당시 다른 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전폭적이다.

우선 제비양의 경우는, 제비기라는 첨단의 무기를 움직인다. 물론 단순히 기계를 조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이 감탄할 만큼의 뛰어난 비행실력을 자랑하며, 라이파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그의 공격능력을 배가시키고,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즉시 구조에 나서는 등 둘도 없는 중요한 파트너이다. 지적인 매력이 강조된 캐릭터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담하고 활동적이다.

녹의여왕이나 벤핑히의 경우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팜므 파탈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잔혹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며, 상황에 따라 남을 이용하기도 하고, 라이파이를 유혹하기도 한다.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거칠 것 없는 성격을 지녔다.
이들의 이런 성격은 특히 복장에서 잘 드러난다. 녹의여왕의 경우, 마법사풍의 넓은 소매를 단 긴 드레스와 해골 지팡이로 권위를 강조하고, 머리에 살아있는 뱀을 감아 올려 뭔가 음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벤핑히는 가슴을 강조하는 무늬의 수영복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그 뒤로는 망토를 둘렀는데, 대단히 에로틱하면서도 도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동용 만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그림2)

그런데 작가는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과는 상반되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여성성’을 이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예컨대, 평소에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침착한 성격의 제비양이 라이파이를 구하러가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라이파이가 기절한 녹의여왕을 보면서, 여성은 물리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게다가 이들이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매만지는 장면은 너무 많아서 지나칠 정도다.

이것이 시대적 타협인지, 작가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장면들은 당시 통념에 비춰볼 때 너무 튀는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을 중화시키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고, 작가가 여성 캐릭터들을 라이파이라는 남성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역으로서만 한정하고, 그들의 개성을 그런 한계 속으로 밀어 넣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여성 캐릭터의 독특한 개성들이 통념의 중력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3. <라이파이>의 연출미학
<라이파이>가 이전 시기 만화보다 뛰어난 세 번째의 요인은 감각적인 연출과 뛰어난 그림솜씨에 있다. 무엇보다 연출이 대단히 자유롭다. 한 페이지를 몇 단으로 나누고, 한 단을 몇 칸으로 나누는 식의 고정된 칸나누기는 매우 느슨하다.
칸의 수는 장면에 따라 나뉘며, 캐릭터들이 꼭 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룰도 없다. 한 컷 내에서 종이가 말려 올라가 다른 시공간으로 전환되기도 하고, 작품 속의 인물이 고개를 돌려 독자에게 말을 건다. 책 말미에 어려운 용어 풀이집을 첨부하거나, 만화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설명(Q&A)도 덧붙인다. 자기 만화에 대한 자화자찬식 홍보도 잊지 않고, 다음 작품에 대한 광고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연출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우선 라이파이는 항상 제비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며, 타잔처럼 줄에 매달려서 그 줄의 반동으로 적을 쓰러뜨린다. 발차기를 할 때도, 반대쪽에서 날라 오며 두 발을 날리거나, 한 발로 몸을 지지한 채 상반신을 다른 쪽 발과 수평을 만들면서 하는 뒷발로 돌려 차는 등 항상 폼 나는 움직임을 연출한다. 물론 맞은 적들도 그 자리에서 얌전히 쓰러지지 않는다. 상반신이 뒤로 젖혀지는 것은 기본, 1-2m 가량 튕겨져 나가고, 구르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에게 얹혀지고, 위쪽으로 솟아올라 천장에 부딪치는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액션 장면은 대부분 사선구도를 이용하여, 역동적인 느낌을 강조하며, 더욱 생생한 움직임을 위해 동작선은 필수적이다.(그림3)


한편 액션 장면의 경우, 두 페이지에 걸쳐 파노라마 식으로 구성되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그림4) 이 경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물들의 대사와 의성어다. 쓰러지는 적들의 대사는 “아이쿠, 이게 뭐냐”!“ 식의 단순한 반응에서부터, ”도대체, 저게 인간이냐?“는 식으로 라이파이의 강함을 설명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꿈자리를 탓하거나, 라이파이를 폭행혐의로 소송을 걸겠다는 허무맹랑한 반응도 있고, 심지어는 다음에 나올 신작을 광고하는 경우마저 있다.

한편 <라이파이>에서는 이전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등장한다. 쓰러질 때 내는 비명만 해도, ‘으엇!’, ’히윳!‘, ’희엇!‘, ’힛추우!!‘, ‘크!’ 등 수십 가지다. 또한 작가는 이를 대단히 멋지게 시각화한다. 예를 들어, 폭발음인 ‘쾅’인 경우를 보면(그림5), 자음과 모음이 두 세 개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인 ‘쿠르릉’과 같은 소리도 ‘쿠르ㅇㄹㅇㄹㄹ르ㅇ’과 같이 음절을 세밀하게 분절하여 여운을 강조하는 식이다.

한편 <라이파이>에서는 거의 모든 컷이 상이한 앵글로 그려지기 때문에 장면전환이 빠른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또한 한 컷은 기본적으로 이전 컷에서의 인물의 시점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플롯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배경을 통한 특별한 공간적인 연출이 생략되어 있어도 3차원적인 입체감과 공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이전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단히 감각적인 연출도 많다. 예를 들면, 추격 장면에서 앞서 도망치는 사람의 다리 아랫부분을 강조해서 그리고, 그 다리 사이로 쫓아오는 사람을 작게 그려 넣었는데, 이는 도망자의 전신을 전부 그리는 것보다 급박한 인상을 강하게 드러내 준다.(그림6) 이 밖에, 캐릭터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기 위해 원근감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기법이나(그림7), 인물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특정 부분을 제외한 부분을 점묘나 사선으로 처리하는 하이라이트 기법도 자주 보인다. 이것은 영화의 클로즈업 기법의 일종인 아이리스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점묘법은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배경에 사용하였을 경우에는 구름이나 안개에 휩싸인 듯한 신비감을 드러내준다.(그림8)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연출기법도 대단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연출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SF라는 장르는 연출이나 묘사에 있어 사실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설정하는 현실이 가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지닌 사건들도 이미 일어난 사건들인 것처럼 전제된다. 그것이 설정하는 현실이 가상적이므로, 사건의 연출과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은 거기서 일어난 사건들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 <라이파이>는 이런 사실성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캐릭터나 배경에 있어서, 만화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여겨지는 과장법이나 변형, 이야기 전개과정에 있어서의 황당한 설정 등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비행기나 보트의 경우에는 납땜한 흔적이나, 나사 못 등 디테일에도 세밀하게 신경쓰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배경의 경우에도 대단히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후반 시리즈로 가면 갈수록, 그림이 엉성해지고, 연출에 들이는 정성이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는 것, 아마도 되도록 빨리 신작을 발표해야만 하는 만화방 질서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4. <라이파이>,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빛나는
<라이파이>가 우리 만화계에서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이전 시기의 만화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였기 때문이다. 외국만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나 사건 구성에 있어서 ‘고유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고정화되기 시작했던 한국 만화의 상상력을 해방시켰다. 명랑만화와 역사만화 위주의 장르적인 속박에서 벗어났고, 캐릭터와 시공간적 배경을 ‘현재의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해방시켰다.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영웅은 후진국이라는 열등감, 전쟁과 분단, 계속되는 가난이 야기한 슬픔,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시켰던 모든 불안감을 지우고,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파이>는 당시의 어린 독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그리고 그 감동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 참고한 책들
대중문학연구회편, 2000,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국학자료원
로버트 스콜즈, 에릭 라프킨 지음, 김정수, 박오복 옮김, 1993,
[SF의 이해] 평민사
로저 새빈 지음, 김한영 옮김, 2002, [만화의 역사], 글논그림밭,
박재동, 1994, [만화! 내사랑], 지인
攬瓚? 1998, [한국만화통사](하), 시공사
존그랜트, 론 타이너 지음, 박세형 옮김, 2000, [SF와 판타지 제작기법의 모든 것],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