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다시보는 우리만화」 저자) |
1970년대 생인 필자에게 <라이파이>는 그리움이 묻어나는 추억의 만화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갑자기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기념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규모에 걸맞은 긴 그림자를 역사 위에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만화계에서 <라이파이>는 하나의 전설이다. SF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환상의 명작! 작가의 갑작스런 도미(渡美)로 인하여 신비화되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확실히 <라이파이>는 “한국 SF만화 최초의 성공작”으로서, 그리고 “최고의 판매 및 구독 기록을 수립한 공전의 히트작”으로서 우리 만화계에 신기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깡통 로봇이나 비행접시가 소품처럼 등장하는 이전의 SF만화들에 비한다면, <라이파이>는 이미 몇 단계나 진일보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SF만화가 가장 빛났던 시기다. 라이파이 이후 SF만화는 쇠弔狗罐? 걷는다. 물론 그 이후에 좋은 SF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SF는 사실상 소수적 장르가 되었다. SF가 1960년대처럼 시대를 대변하는 장르가 된 적은 다시 없었다. 또한 만화계의 SF붐이 다른 장르로 파급된 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예컨대, 문학의 경우 SF소설을 본격적으로 수입 번역한 것은 1960년대 초반, 라이파이 시리즈가 끝나갈 무렵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에 대부분의 SF소설들이 ‘아동용’으로 개작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인데, 아마 라이파이로 촉발된 SF붐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라이파이가 “정말 중요한 작품이구나!”하고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 듯이, ‘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환상적인 발차기로 적들을 무찌르던 정의의 용사’를 묘사하면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때이다. 그들의 추억담 속에서 라이파이는 만화를 넘어 어떤 신화처럼 되살아나는 것 같다. 도대체 그 무엇이 라이파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1 전 지구를 누비는 스펙타클의 세계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발전된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엄청난 속도감(!) 덕분에 이들 공간이 결코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광속으로 움직이는 제비기를 타면 단 몇 시간 만에 지구를 횡단할 수 있다. 덕분에 라이파이는 오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침입한 악당을 무찌르고, 오후에는 히말라야에 있는 적들의 근거지를 소탕하는 종횡무진한 활약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넓은 공간적 배경은 라이파이의 능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만, 무한한 라이파이의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오히려 좁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파이>의 공간들, 악당들의 기지와 요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 시리즈를 통해서 살펴보면, 주로 험준한 산맥과 사막, 거대한 호수, 극지방 등 자연적 고립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인간의 손이 미칠 수 없었던 자연을 ‘정복’했다는 것, 즉 그들이 그만큼 놀라운 과학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의미한다. 공간은 넓을 뿐 아니라, 미답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미지의 공간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이러한 공간의 개척이 15세기 이후 계속되어온 서구의 탐험과 모험문화, 즉 그것은 발견(개척)해야 할 미지의 공간으로서의 ‘신대륙’과 ‘동양’을 바라보던 ‘서구’적 시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곳은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비(非)서구’적인 곳으로 다시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한편에서는 신비롭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곳! 이러한 관점은 1960년대 유행했던 모험, 탐험만화에 일반적으로 나타났으며, 서구의 모험, 탐험소설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2. 영웅(Super-Hero)과 악당(Anti-Hero) 1) 라이파이: 초인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그러나 라이파이는 배트맨을 비롯한 미국의 영웅들과 전혀 다르다. 우선 그는 단일한 인격을 지녔다. 즉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의 또 다른 인격이고,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라는 보통 사람의 가면을 쓰는 것에 비해, 라이파이는 ‘라이파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을 갖는다. 비록 얼굴은 감추고 있지만, 숨겨진 인격이나 이면은 없다. 그러므로 배트맨처럼 어둠 속을 고독하게 헤맬 필요도, 수퍼맨처럼 무력한 겁쟁이의 모습을 연기할 필요도 없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다. 둘째, 라이파이는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라이파이는 초인이면서, 또한 ‘인간’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점은 라이파이가 악당 등을 물리적인 힘으로만 제압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악상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교화시키려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 복수와 응징이란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 그는 폭력이란 정의의 이름으로 사용해도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라이파이가 영웅일 수 있는 최고의 이유다. 2) 악당들, 야심찬 혹은 비열한! 첫째, 광적인 과학자들. 둘째, 고대국가의 후예들. 셋째, 공산주의자. 악당이란 그 스스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웅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악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라이파이의 활약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악이 비열하면 비열할수록 라이파이의 정의로움은 더욱 빛난다. <라이파이>에 등장한 악당들의 공통점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한편 이들은 높은 과학기술에 비해서 대단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적이나 부하를 채찍으로 고문한다든가, 콜로세움에서 거인이나 사자와 싸움을 붙인다든가 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죽기 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감동적인 라스트 씬을 연출하기도 한다.
우선 제비양의 경우는, 제비기라는 첨단의 무기를 움직인다. 물론 단순히 기계를 조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이 감탄할 만큼의 뛰어난 비행실력을 자랑하며, 라이파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그의 공격능력을 배가시키고,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즉시 구조에 나서는 등 둘도 없는 중요한 파트너이다. 지적인 매력이 강조된 캐릭터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담하고 활동적이다. 녹의여왕이나 벤핑히의 경우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팜므 파탈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잔혹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며, 상황에 따라 남을 이용하기도 하고, 라이파이를 유혹하기도 한다.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거칠 것 없는 성격을 지녔다. 그런데 작가는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과는 상반되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여성성’을 이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예컨대, 평소에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침착한 성격의 제비양이 라이파이를 구하러가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라이파이가 기절한 녹의여왕을 보면서, 여성은 물리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게다가 이들이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매만지는 장면은 너무 많아서 지나칠 정도다. 이것이 시대적 타협인지, 작가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장면들은 당시 통념에 비춰볼 때 너무 튀는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을 중화시키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고, 작가가 여성 캐릭터들을 라이파이라는 남성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역으로서만 한정하고, 그들의 개성을 그런 한계 속으로 밀어 넣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여성 캐릭터의 독특한 개성들이 통념의 중력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3. <라이파이>의 연출미학 하지만 이런 다양한 연출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우선 라이파이는 항상 제비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며, 타잔처럼 줄에 매달려서 그 줄의 반동으로 적을 쓰러뜨린다. 발차기를 할 때도, 반대쪽에서 날라 오며 두 발을 날리거나, 한 발로 몸을 지지한 채 상반신을 다른 쪽 발과 수평을 만들면서 하는 뒷발로 돌려 차는 등 항상 폼 나는 움직임을 연출한다. 물론 맞은 적들도 그 자리에서 얌전히 쓰러지지 않는다. 상반신이 뒤로 젖혀지는 것은 기본, 1-2m 가량 튕겨져 나가고, 구르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에게 얹혀지고, 위쪽으로 솟아올라 천장에 부딪치는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액션 장면은 대부분 사선구도를 이용하여, 역동적인 느낌을 강조하며, 더욱 생생한 움직임을 위해 동작선은 필수적이다.(그림3)
한편 <라이파이>에서는 거의 모든 컷이 상이한 앵글로 그려지기 때문에 장면전환이 빠른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또한 한 컷은 기본적으로 이전 컷에서의 인물의 시점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플롯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배경을 통한 특별한 공간적인 연출이 생략되어 있어도 3차원적인 입체감과 공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이전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단히 감각적인 연출도 많다. 예를 들면, 추격 장면에서 앞서 도망치는 사람의 다리 아랫부분을 강조해서 그리고, 그 다리 사이로 쫓아오는 사람을 작게 그려 넣었는데, 이는 도망자의 전신을 전부 그리는 것보다 급박한 인상을 강하게 드러내 준다.(그림6) 이 밖에, 캐릭터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기 위해 원근감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기법이나(그림7), 인물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특정 부분을 제외한 부분을 점묘나 사선으로 처리하는 하이라이트 기법도 자주 보인다. 이것은 영화의 클로즈업 기법의 일종인 아이리스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점묘법은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배경에 사용하였을 경우에는 구름이나 안개에 휩싸인 듯한 신비감을 드러내준다.(그림8)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연출기법도 대단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연출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SF라는 장르는 연출이나 묘사에 있어 사실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설정하는 현실이 가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지닌 사건들도 이미 일어난 사건들인 것처럼 전제된다. 그것이 설정하는 현실이 가상적이므로, 사건의 연출과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은 거기서 일어난 사건들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 <라이파이>는 이런 사실성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캐릭터나 배경에 있어서, 만화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여겨지는 과장법이나 변형, 이야기 전개과정에 있어서의 황당한 설정 등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비행기나 보트의 경우에는 납땜한 흔적이나, 나사 못 등 디테일에도 세밀하게 신경쓰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배경의 경우에도 대단히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후반 시리즈로 가면 갈수록, 그림이 엉성해지고, 연출에 들이는 정성이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는 것, 아마도 되도록 빨리 신작을 발표해야만 하는 만화방 질서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것은 어느 정도 고정화되기 시작했던 한국 만화의 상상력을 해방시켰다. 명랑만화와 역사만화 위주의 장르적인 속박에서 벗어났고, 캐릭터와 시공간적 배경을 ‘현재의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해방시켰다.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영웅은 후진국이라는 열등감, 전쟁과 분단, 계속되는 가난이 야기한 슬픔,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시켰던 모든 불안감을 지우고,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파이>는 당시의 어린 독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그리고 그 감동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 참고한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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