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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북쪽에서 바라본 풍남문의 모습이다. 1963년에 보물 308호에 지정된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주성의 남문으로써 “풍패지향”의 ‘풍’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서문당 제공 |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가운데 검색을 통해 위성사진을 보려다 우연히 현재 살고 있는 전주의 옛모습 사진을 보게 됐다.
예전에도 봐오던 이 사진들은 노스케 스코그 전주공장(전신 한솔제지)의 종이박물관에서 2004년 4월부터 5개월간 전시한 '조선시대의 전주' 특별기획전시회를 통해 공개된 사진들(예수병원, 서문교회 등 제공)과 전주역사박물관 사이트에 게재된 옛날 전주모습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을 보노라면 전주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진들이라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옛날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그 당시 조상님들의 생활상들과 살고 있는 전주 모습의 변천을 언제든 볼 수 있어 기분이 좋다.
특히 신흥학교 학생들이 예배 하기 위해 다가교를 건너 서문교회로 가고 있는 사진이라든가 지금의 완산초등학교자리에 있었다는 최초의 예수병원 모습, 다가산과 국궁장인 다가사정(현재의 천양정) 등은 백년전 조상님들과 그 생활상 등이 한눈에 들어와 더 새롭다. 이외에도 더많은 옛 모습 사진들을 더 보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세워진 지 백년이 넘은 예수병원이나 역사박물관, 신흥학교 등에 가면 더 많은 전주지역 사진들이 있을 것이니 조만간 가서 보고싶어진다.
100년 전 전주모습을 사진으로 봤으니 이제는 100년전 그 장소 그 앵글로 현재의 전주사진을 찍어 비교해보기 위해 조만간 올려볼까 한다. 전주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특히 전주의 옛 사진들을 통해 오늘을 반성해보고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 드문 것 같다. 전주문화원이나 전주문화사랑회 같은 사이트에서도 전주 모습이 나타나있는 사진들은 전무했다.
과거의 지나간 역사를 사진으로나마 봄으로써 오늘 우리들의 위치를 재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주지역의 옛 사진들이 디지털화되지 않고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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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주성 풍남문 모습이다. 갓을 쓰고 있는 사람도 그렇고 남문 좌우측 건물이 초가집에서 일본의 전형적인 다다미집이 있는 점에 미뤄 이 사진은 서문당이 제공한 위 풍남문 사진보다 훗날의 사진으로 보인다.ⓒ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들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함경도 동북면과 함께 조선 왕실의 ‘풍패’였다. 2층 누각에 걸린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란 현판은 전주가 호남의 수부(首府)라는 뜻으로, 헌종 8년(1842)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라 한다.
현재 전주시 남문 주변은 서울 남대문처럼 사방 갈래로 길이 나있다. 성문의 모양과 규모, 성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 모습, 성문을 중심으로 로터리 모양으로 길이 있는 것이 흡사 남대문과 빼닮았다.
현재 남문 주변은 남부시장으로 형성되었고 남문 뒷편으론 구 전북도청 가는 길(조선시대에 전라감영이 있든 자리), 사진에서 우측 방향은 전동성당 좌측은 남부시장을 통과해 완산교로 가는 길이다. 남문 정면 앞으로 난 길로 가면 남부시장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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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전북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조경단 모습.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인데 덕진시민공원 내 건지산(乾止山)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한은 조선 태조 의 21대조로, 태조는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도록 했다고 한다. 고종은 1899년(광무 3) 5월에 이곳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했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덕진공원을 지나 전주동물원 가는 길에 있는 조경단은 지금도 일반인 맘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어릴 때 동물원으로 소풍가서도 그렇고 이미 자랄대로 자란 지금도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조경단.
전주 이씨 시조 조상님들을 모신 곳이라 신성한 곳이어서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모양인데, 바깥 철제 울타리 너머로만 봐오던 조경단에 직접 들어가 조상님들의 얼과 숨결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시대가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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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전주 시가지 풍경으로, 왼쪽 끝의 문루가 풍남문이고, 중앙의 서양식 건물이 재무감독국이며, 그 오른쪽 끝에 경기전이 보인다. ⓒ서문당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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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시가지 모습.오른쪽에 성문이 보인다. 어떤 성문일까? 서문당 제공 전주시가지 사진으로 추측해보건대 일제때 없어진 북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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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전주읍성의 모습이다. 전주성의 성벽이 그대로인 채 온전히 살아있다. 이런 견고한 성을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점령하기도 했다. 내가 성벽이 그대로인 성문 사진을 본 것은 이 사진이 처음이다. 이런 성벽이었구나 신기하기만 하다.ⓒ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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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전후 전주의 모습이다. 당시 전주의 인구는 10,000명이 채 안되는 조용한 도시였다. 멀리 기린봉이 보이고, 좌측은 향교가 있는 교동부근이며, 우측의 인파가 있는 곳은 현 남부시장 자리이다. ⓒ전주서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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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전여학교 풍경. 기전학교는 1902년에 테이트(Lewis Boyd Tate ; 1862~1929) 선교사가 서너 명의 여성들을 서양식으로 교육시킨 것이 시작이며, 1909년에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기전(紀全)이란 말은 학교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진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 全緯廉 ; 1865~1908) 선교사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전주서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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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신흥학교 학생들이 전주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면서 신흥학교는 1920년에 60명에 불과하던 학생 수가 1921년에는 200여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주일에는 학생과 교직원들이 단체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전주서문교회 |
사진 왼쪽은 다가산을 지나 중화산동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현 충경로 방향이다. 지금은 4차선도로가 된 다가교를 건너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가시는 신흥학교 조상님들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천변공사로 물이 메말라 놓여져있는 돌다리를 통해서도 건널 수 있지만 80년 전 전주천은 사진에서처럼 한강같은 많은 물이 흐르고 있고 우거진 숲 사이로 신흥학교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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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학교는 1900년에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 1867~1951) 선교사가 한 소년에게 신식 교육을 시키면서 시작되어 이후 1909년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옛 희현당 자리에 벽돌 2층 양옥 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서양식 2층 건물이 신흥학교 건물이다.ⓒ전주서문교회 |
100년이 넘은 개교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흥중고등학교가 처음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양식 건물 한동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신흥학교 교가에도 희현당이 나오고 실제 건물이름도 희현당이라는 신흥건물도 있는데 이 희현당이란 곳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이 지방 유지인 진사 오명기(吳命模)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司馬齋 :生員과 進士가 모이는 곳)터에 창건한 학당으로 30명의 학생에게 교육을 가르친 곳이다. 조선말 사색당쟁으로 인해 퇴락했던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졌는데 신흥학교가 희현당의 본래 목적에 맞는 교육역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 의미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사진 왼편의 한옥 건물이 있는 산언덕자리는 현재 예수대학(옛 예수간호대)이 자리잡고 있고 뒤에 있는 산은 지금의 화산서원비가 있는 화산공원이다. 화산공원 기슭에는 기전여대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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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산에서 내려다 본 전주의 모습이다. 중앙에 보이는 기와 건물이 다가사정(多佳射亭)이고, 우측 상단의 나무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기린봉이다. 중앙의 기와 건물 뒤로 보이는 4대문 안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당시 전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전주서문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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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사택과 예수병원. 예수병원은 1898년 미국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에 의해 시작되었다. 잉골드 박사는 전주 성문 밖 은송리(현 완산초등학교 부근)에 조그만 집 한 채를 구입하여 어린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였다. 사진 중앙의 한옥 건물이 전주 최초의 의료기관인 예수병원이고 그 주변에 선교사들의 사택이 보인다.ⓒ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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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을 설립한 잉골드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이다. 여자 환자의 종기를 치료하는 듯한 모습이며,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이 의사의 진료를 보조해 주고 있다. ⓒ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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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예수병원 최초의 서양식 건물. 이 건물은 현재 다가공원내의 엠마오노인병원 바로앞에 있으며 지금도 주인이 이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석대 한의대가 의학건물로 이용하던 기억이 있다. ⓒ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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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현재 다가공원내의 엠마오사랑병원으로 바뀌었다.ⓒ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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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완산동 시외터미널 옆 골목길로 올라가거나 중화산동과 완산동을 잇는 강당재를 넘어 내려오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해있던 초창기 예수병원이다.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1910년대 사진이다. 이 건물들중 예수병원 본관건물과 앞 건물은 현재에도 다가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다.사진에서 바로 앞의 가로로 놓인 길이 화산동(사진 왼편)과 완산동(사진 오른편)을 잇는 강당재로 넘어가는 길이다.ⓒ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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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다가산에 위치해있던 예수병원이 화재로 소실된 사진이다. 바로 위사진과 변함이 없다. ⓒ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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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북도청 모습. 지금과 별반 다름이 없고 그 앞에는 큰 비포장길이 있다. 현재는 구 도청건물이 됐고 그 건너편에 완산경찰서(옛 중부경찰서)가 있고 그 뒷편길로 가면 바로 남문이 서있다.ⓒ예수병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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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조상님들을 촬영한 1890년대 사진.ⓒ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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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전주시장 풍경으로, 전주의 장날은 이미 동국문헌비고 (1770)을 비롯하여 임원경제지(1830)와 호남읍지(1872) 등에 남문(2일), 서문(7일), 북문(4일), 동문(9일)과 인접의 소양(1, 6일), 삼례(3, 8일) 등 모두 11개나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임원경제지(1830)에서는 전주에 중국과 일본 상품이 들어오며, 여상(旅商)들이 몰려들고 온갖 물품이 넉넉하여 국중(國中)의 시장이라 부를 만 하다고 기록하였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전주서문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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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상거래가 이루어진 곳으로는 전주천변을 따라 펼쳐진 장들을 들 수 있다. 전주교 즉 싸전다리 밑으로는 싸전이, 매곡교 근처에서는 쇠전, 설대전이 섰었다고 한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쇠전과 설대전 맞은편 부남 은송리 앞의 전주천변은 초록바위 아래까지 ‘나무전’이 펼쳐진다. 또한 왜정말기 매곡교에서 완산교 사이에는 종이, 책, 옷가지를 비롯하여 국수, 수제비, 개고기, 기름, 번데기, 개떡 풀떼기 등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전주서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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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주시장 풍경이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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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주 우시장 풍경이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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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서문교회의 종각을 짓는 모습이다. ⓒ예수병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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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서문교회 종각에 매달을 종의 모습이다. ⓒ예수병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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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주역의 모습이다. 1914년 전주시 서노송동에서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전주역은 1981년 우아동 현 위치로 옯겨졌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이 사진속 전주역은 현재의 전주시청 뒷편에 있었으며 그 앞으로 철도가 들어섰다. 현재는 과거의 넓은 철도가 기린로라는 넓은 도로로 바뀌었다. 이 도로는 신리, 남관, 남원 등 전북 남부지역을 잇는 교통요지다.
중고등학생때 항상 의문이었던 것은 시내 도로들은 모두 좁은 반면 시청뒤 기린로는 꽤 넓은 도로였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넓을까 궁금해하다가 10년전에서야 그곳에 예전에 철도가 있었고 전주역이 이전하면서 도로로 바뀌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이 기린로자리가 일제때 철도였었고 81년 우아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도 철도였을 때는 기린로와 금암분수대를 거쳐 전북대로 향하는 팔달로도 철길이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시청 뒤에 형성된 집장촌도 전주역이 만들어지고 나서 형성된 것인지 등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것까지도 궁금해지는 곳이 기린로다.
1930년대 전주역 건물을 보면 볼수록 현재의 우아동 전주역 건물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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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주관아 모습이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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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주 경기전 모습이다. 사적 제339호인 경기전 정문과 담은 지금과 변함이 없고 이 부근은 한옥마을로 조성되어 있어 맑은 휴일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어서 경기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사진 바로 앞의 하마비가 지금은 경기전 정문 바로 앞에 놓여져 있다. 하마비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를 말한다. 사진에서는 하마비를 받쳐주고 있는 동물 모양의 비석돌이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경기전은 전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폭의 포근한 위안처가 되어준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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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주교 모습이다. 지금은 싸전다리로 다리명이 바뀌었다. 사진 왼편으로 천주교인 사형장으로 쓰였던 초록바위(현재는 앞 도로 개설로 앞부분이 상당수 깎였다)가 있고 사진 오른편에 난 길은 한벽루로 통하는 길이다. 사진 오른편에서 다리 건너 왼편으로 가면 남쪽 평화동이고 반대편은 북쪽 팔달로로 가는 길이다. 전주천의 풍성함이 이 사진에서도 보여준다.ⓒ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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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다가동 거리 모습이다. 사진 왼편으론 완산동 오른편으른 구 전북도청자리, 직직하면 충경로로 통하는 길인 듯 싶어 아마도 다가우체국 사거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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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 전주 대정정거리 모습이다.ⓒ전주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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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의 미원탑 모습이다. 울엄마가 내가 어렸을 때 자전거 타고 이곳 미원탑 부근에서 많이 집 잃어버렸다고 했던 '전설의 미원탑'. 전주사람이라면 미원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당시엔 아마도 이런 모양의 건물이 없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사거리인걸로 보아 충경로 사거리(옛 관통로 사거리)인 듯 싶고 미원탑 자리는 현재의 국민은행 자리인 것 같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