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공주공산성 (사적제12호)
금강과 맞닿은 공산성은 해발 110m 구릉위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석축과 토축으로 여러개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웅진 시대에 왕이 거주하던 궁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백제시대에는 공주성으로
조선시대에는 인조가 머물다 간 뒤로는 쌍수산성이라고 불렀다.
둘레는 약2,660m 장방형 산성으로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1993년에 동문터에 영동루, 서문터에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올라가는 입구에는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세긴 송덕비석들이 즐비하다.
이 비석들은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등 47기가 세워져 있다.
공산성 4개의 성문중 가장 먼저 만나는 성문은 "금서루" 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것을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성내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 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으며
연꽃 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기와, 토기 등의 유물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어느쪽으로 먼저 돌까 망설이다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공산정오르는 길에 내려다본 주 출입구 "금서루"
바로 앞에 공산정은 2009년 시민 공모를 통해 이름 지어졌는데
금강과 금강철교와 건너편 신시가지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전망 할 수있다.
금강철교는 1933년 준공한 철교로 당시에는 한강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 (514m)였다고 한다.
6.25 때 2/3 정도 파괴된것을 1952년 복구하여 민족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로 현재는 일방통행을 하고 있다.
공산성 긴 성곽길 중에 고목의 유연함이 멋스러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공복루로 남쪽의 진남루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충청도 지역 사람들이 한양을 오갈때 통과하는 중요한 문이다.
공복루 앞에는 금강을 오가던 배다리가 놓였던 터가 남아있는데
다리가 놓이기전인 1920~1930년 사이에 약 25척의 배를 연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궁금하여 가까이 갔더니 공주 잠종냉장고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충남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로 누에는 알 상태로 월동하여 4월 중순에 부화한다.
그러나 누에의 먹이인 뽕잎은 5월에 피는데 이때 부화를 억제시켜 농가에 보급하기 위해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잠종냉장고에 넣음으로써 낮은 온도를 유지하게 하여 누에의 부화시기를 늦추었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 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지로 금강에 가까이 위치하여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연못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을 이루게 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시설을 하였다.
연지 앞에 있는 만하루는 영조때 건립되었는데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 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어 1984년 발굴 조사하여 복원하였다.
특히, 위는 넓고 아래는 좁으며 성의 안과 밖을 몰래 출입할 수있도록 만든 암문이 연못까지 연결되어 있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 암문은 전쟁이나 성안에 위급한 일이 있을때 드나 드는 문으로
성벽에 누각없이 만들어 평소에는 돌로 막아 뒀다가 비상시에만 사용하였다고 한다.
영은사는 1458년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지은 작은 사찰로 광해군 때는 승장이 머물렀던 곳이며
임진왜란때는 승장인 영규대사가 머물며 승병들의 합숙소로 사용하였다.
시간이 빠듯하여 명국삼장비, 김구 선생이 이름 지어주었다는 광복루, 동성왕이 지은 임류각은 다음에 보기로 한다,
진남루에서 출발지 금서루 쪽으로 다시 방향를 바꾸면 왕궁지로 추정되는 넓은 터를 만난다.
이곳에는 쌍수정과 쌍수정 사적비, 왕궁터 연못과 왕궁지를 볼 수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의 피애 머물었던 곳인 쌍수정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그 기쁨을 정자 앞에 두그루의 나무에 정3품의 높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후 나무는 죽었지만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쌍수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 "쌍수정 사적비"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있다.
왕궁추정지 바로 옆에 있는 연지는 흙으로 파 묻혀 있었는데 흙을 걷어내니본래의 모습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제의 유물인 연꽃무늬 기와와 세발토기, 벼루, 등장 등이 나와서 백제시대의 연못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깊이는 4 m 가 넘구 진흙으로 1m 이상 두껍게 발랐는데 다른곳에 물을 길어다 저장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금서루와 공산정
▲ 금서루
공산성앞 "희가"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공산성에는 야간 조명이 비춰져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좌측부터 만하루, 공복루, 공산정까지 아득하지만 낮에 보았기에 실루엣만으로도 즐거운 사진이된다.
공산성 (사적제12호)